친구랑 나는 15년 지기 친구야. 어렸을 때 부터 정말 티격태격 많이 하던 친구였지.친구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고, 허당이었고(?), 허세가 전혀 없는 친구였지.
갑자기 어느 날, 친구가 간호학과에 지원했다는 거야. 어렸을 때부터 자유분방하고 청개구리 같고 넓은 세상을 꿈꾸는 친구였거든. 근데 갑자기 간호학과? 함께 재수를 했고, 재수를 끝내고 다시 만난 날 둘다 간호학과에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에게 의아해 했던 기억이 나. (둘다 정말 정말 간호사와 어울리지 않았거든..ㅎ 주변 사람들도 다 놀랬어.)
사실 그 때 당시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서, 친구가 왜 간호학과를 갔는지 잘 몰랐거든. 원하던 대학이 있었고, 점수 맞춰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줄 알았어. 그래서 이번 독일 여행에 와서 친구한테 물었어. 왜 간호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냐고.
친구는 고등학생 때 막연히 국제 무대에서 일을 해 보고 싶었대. 세상을 더욱 좋게 만드는 행위가 너무 멋져 보였었고. 하지만 수능을 보고 원하는 대학에 국제 관련 학부를 가기에 점수가 조금 모자랐고, 원하는 학과와 원하는 대학에서 고민을 했었대. 그런데 대학 전공은 사실 과의 '이름'과 현실이 매우 다르잖아? 그걸 깨닫고 그럼 국제적으로 일할 수 있고, 세상을 멋지게 바꿀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하던 차에 의료계쪽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친구는 지금은 병원의 간호사가 아니라 독일의 대학원에서 인구학을 연구하고 있어. 그 선택도 계기가 있었다고 하더라고. 우연히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독일 연수를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다양한 과의 친구들을 만났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는 졸업하면 간호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 직업이 자신과 맞지 않고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기 싫다는 투정어린 이야기를 했는데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
"언니, 그런 생각하지마. 나는 영문학과인데, 영문학을 전공하고 셰익스피어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 같아? 다들 엄청 고민하고 자신의 흥미와 적성이 무엇인지 고려해서 진로를 정하는 거야. 영문과에 왔으니까 000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내 미래를 결정하고 싶지 않아. 그건 간호학과도 마찬가지고."
그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대. 사실 그 앞에서 '너는 모르잖아' 생각한 것도 있었지만, 결국 그 말을 통해 친구도 자기가 너무 시야를 좁게 두고 있었구나, 싶었다고 했어. 사실 간호학과가 맞지 않아서 힘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학 싶은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두려워 남들이 정해 준 길을 택하고 있었구나. 결국 중요한 것은 모든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거고, 늦은 선택은 결코 없다는 것을.
TMI긴 한데, 내 친구는 중국집에서 메뉴 하나도 결정을 못하는 친구거든. 근데 본인 인생의 선택에서는 참 결단력 있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는데, 자기는 좋아하는 일에 굉장하게 몰입하는 스타일이고 결국 재미있는 일을 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고 하더라. 그게 공부였고. 지금 하는 일이라는 거야. 그건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하니까, 간호학과를 다니면서 알았대. 우연한 계기로 연수를 가서 난민과 관련된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 내용으로 대학 논문도 쓰게 되었는데 이게 너무 재미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지금은 노화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더라고. (친구가 좋아하는 분야에는 변태(?)처럼 몰두하는 스타일이거든. - e.g. 해리포터....) 본인이 한 경험들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나온 결과였어.
오랜 시간 이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왜 얘랑 맨날 싸우면서도 여지껏 친구를 하고 있는지 알겠더라. (원래 친구랑 진짜 안 싸우는데 말이야...^^) 대화를 통해 성격도 사고 방식도 다르지만, 살아가는 방식이 비슷한 걸 느꼈어.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도, 배우자를 고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취향과 생각은 다르지만, 그 뿌리가 참 비슷하더라고.
그리고 참 멋져보였어. 자기가 하는 일에 뚜렷한 철학이 있고, 음식 메뉴는 못 고르지만(ㅎ) 본인의 기로에서는 줏대있는 선택을 하는 것. 15년 간 친구를 하면서 이 친구를 참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멋진 모습은 여지껏 모르고 살았구나 싶기도 하고. 가까운 사이일 수록 대화가 더더욱 많이 필요한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아. 오랜만에 친구를 제대로 알아가는 시간이었어서, 나에게도 굉장히 뜻 깊은 시간이었지.
사실 대화로는 부족해서, 친구에게 서면 인터뷰를 부탁했어. 오늘의 내용을 기반으로 더 딥하게 전후 사정(?)을 알고 싶었거든. 내가 거의 삥 뜯듯이(?) 부탁하긴 했는데, 지금 보니까 엄청 열심히 쓰고 있네.^^* 요거 다 완성되면 레터로 공유해 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