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취미가 있어? 내가 최근에 본 영상에서 한 교수님이 취미는 아무리 힘들어도 이건 꼭 하고 싶은, 나에게 힐링이 되는 행위라고 하더라고. 나는 매우 매우 동의해.
2018년, 간호사로 첫 사회 생활을 할 때가 생각이 나는데.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환경을 좋아하고, 꼼꼼하고 반복적인 일엔 쥐약인 나에게 간호사 일은 단점을 극복해야만 하는 일이었어. 초반에는 실수 - 혼남의 반복으로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지면서 빨리 일이 익숙해지기만을 고대했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몸에 긴장을 잔뜩 하고 다닌 탓에 일 초반에는 살도 꽤 많이 빠졌던 것 같아.
그때 나는 사람에게 받은 스트레스는 사람으로 풀었던 것 같아. 회사에 내 편이 아무도 없으니 내 편인 사람들, 친한 사람들과 놀러다니며 울적한 기분을 털어냈지. 하지만 그것도 다 순간이더라. 그 순간 우울한 감정은 떨쳐낼 수 있겠지만 집에 돌아오면 내일을 버틸 생각해 또 스트레스를 받았어. 일이 익숙해지고 회사에 내 편인 선/후배들이 많아져도 마찬가지더라. 일이 익숙해지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혼자가 되면 여지 없이 울적해졌으니까.
그래서 후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취미를 꽤 많이 가지기 시작했어. 피아노도 꾸준히 배우면서 공연도 나가고 아이패드를 사서 인스타툰도 그리기 시작하고, 바디프로필도 찍어보고... 이때 혼자 여행도 처음으로 시작했었지. 그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을 점점 더 늘려왔던 것 같아.
돌이켜보면 그런 시간들이 내가 맞지 않는 간호사를 3년 넘게 잘 할 수 있게 도와주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ㅎㅎㅎ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구멍이 있었던 거야.
취미가 나에게 왜 힘이 되었을까 좀 더 생각해보면, 취미는 압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잘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 그 순간을 즐기는거야. 그리고 성장 속도도 내가 알아서 정하잖아. 꽂히면 연습을 빡세게 해서 실력을 올리기도, 조금 질리면 잠시 쉬어가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의 '재미'를 위해서. 악보에 집중하고, 내가 그리는 그림에 집중하다보면 잡생각도 많이 사라지고.
어릴 적에는 핸드폰도 없고 인터넷을 할 환경이 아니었다보니 종이랑 펜, 피아노만 있으면 혼자서 몇 시간도 시간을 보냈거든. 그런데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면서 순수한 몰입의 시간이 줄어들게 되었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다 댓글 창을 열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더 먼저 보고,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보면서 시끄러운 머릿속을 더 시끄럽게 만든 것 같아. (인스타그램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더 심해진 것 같아) 그러다보면 내 생각이 뭔지 잘 모르겠는거야. 집중력도 떨어지고 금세 정신이 피로해졌어.
이런 환경에서 취미는 나의 정신을 맑게 만들어 주곤 해. 나는 워낙 머릿속이 시끄러운 사람이라 명상을 잘 못하는데, 모닝페이지를 쓰거나 취미생활을 할 때 명상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머릿속이 고요해져서 좋더라. 한 가지에 몰입해서 작은 성취를 만드는 행위가 나의 정신을 치유해 주는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항상 취미가 많았어. 손으로 만드는 것도 좋아해서 그림 그리는 것, 모루 인형, 양모펠트, 원데이클래스, 피아노, 우쿨렐레, 보컬 수업, 관심이 있는 것들은 일단 해 보면서 오래 가져갈 취미를 찾았지. 결국 어릴 때부터 즐겨왔던 '그림'이 남더라.
근데 어느 순간 그런 취미에 점점 흥미가 떨어졌어. 회사를 다닐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고, 퇴사 후 우울감을 느끼고 있을 시기에 가장 심해졌어. 취미 생활로 즐기던 모든 것들이 다 귀찮게 느껴지는 거야. 다 뻔한 느낌이랄까? ^_ㅠ 좋아했던 그림마저 일처럼 느껴졌고, 이상한 완벽주의가 생겨서 시작도 전에 부담을 갖게 되더라. 취미도 에너지가 어느정도 있어야 한다는 걸 이때 깨달았던 것 같아. (특히 마음의 에너지가. 정신적으로 소진된 상태면 취미도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어.)
부담을 내려놓고 두 달 간 막 살다보니까 어느 순간 조금씩 회복이 되기 시작했어. 하고 싶은 일들이 조금씩 생기면서 정신 차려보니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 핀터레스트에 대충 그리고 싶은 사진을 띄워놓고 따라 그리기 시작했어. 사실 어린 시절부터 만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 그때 인체를 잘 그리고 싶었는데, 한 번도 배워본적이 없어서 한 번 가볍게 공부해보자 싶었지. 그래서 핀터레스트에서 따라그리던 작가님이 판매하는 책을 알게되어 그 자리에서 주문을 했어.
그렇게 그림 공부를 시작한지 벌써 2주가 되었어. 책 한 권을 다 끝냈고, 쌓여 있는 나의 그림들을 보니 꽤 뿌듯하더라. 조금씩 늘어가는 나의 실력도 너무 재미있고 좋아하는 영상을 틀어놓고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이 너무 좋은거야. 그래서 어제는 새벽까지, 오늘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지 뭐야. (남편이 신기해 함..)
만약 처음부터 내가 제대로 해보겠다고 만화 학원을 끊고 정석 책을 사서 빡세게 공부를 시작했다면 또 금세 질렸을거라 생각해.(일본어가 그랬다지...) 그냥 지금 당장 가볍게라도 시작해보고, 궁금한 게 생기면 그때 그때 찾아보면서 천천히. 돌이켜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 꾸준히 지속하는 것들은 아주 작고 가볍게 시작해 꾸준하게 쌓아올린 것들이 많더라구. 이 과정에서 좋아하는 일도 발견했던 것 같아. (유튭 시작하겠다고 90만원 주고 카메라 + 외장하드 샀지만 시작도 안한 1인.. 장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
나는 여전히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더라. 어릴 적 방학만 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화를 보거나 만화를 그렸었는데 지금도 그러고 있는 내 자신이 신기해. ㅎㅎㅎㅎ
종종 취미가 없어서, 좋아하는 일이 없어서 고민인 공주를 만나곤 하는데 여기에는 위에 적은 것처럼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에너지가 없을 정도로 현재 내 상태가 많이 방전되어 있거나, 취미도 '잘' 하고 싶어해서 시작에 과한 힘을 주는 거야. 뭐든 처음 시작은 부족할 수 밖에 없거든. (그리고 '부족'은 주관적기도 하고)
어설픈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처음부터 완벽하려 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 집중하는거야. 그 순간이 재미있나? 나는 피아노도, 그림도, 보컬 수업도. 느려도 조금씩 성장하는 내 모습이 재미있거든. 노래나 그림은 옛날부터 배워보고 싶었던 것들이라 더 재미있는 것 같아.
아직 취미가 없다면, 아직 시작을 하지 못했다면 지금 당장. 0원으로 아주 작게 시작해봐. 현재에 몰입하고, 과정을 즐기는 순간이 제법 짜릿하거든. 갭이어 공주들 모여있는 단발이네 놀이터(오카방)에서 취미 이야기도 나누고 했는데 다들 멋진 취미들 많이 가지고 있더라. 공주는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ㅎㅎ |